조지 오웰

에릭 아서 블레어 (1903년 6월 25일 ~ 1950년 1월 21일)는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영국의 소설가, 시인, 수필가, 언론인, 평론가다. 그의 작품은 명쾌한 산문, 사회 비판, 모든 전체주의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와 파시즘 모두)에 대한 반대,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로 특징지을 수 있다.

오웰은 알레고리적 단편 소설 동물 농장 (1945)과 디스토피아적 소설 1984 (1949)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작품은 문학 비평, 시, 소설, 논쟁적 저널리즘을 포함한다. 그의 논픽션 작품에는 잉글랜드 산업 지대의 노동자 계급 생활을 기록한 《위건 피어로 가는 길》(1937)과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공화파 진영에서 싸운 경험을 기록한 《카탈로니아에 대한 헌사》(1938)가 포함되며, 이 작품들은 그의 정치, 문학, 언어, 문화에 대한 에세이들과 함께 비판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오웰의 작품은 대중 문화와 정치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오웰리안”이라는 형용사—전체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회적 관행을 묘사하는—는 그의 신조어 중 하나인 “빅 브라더”, “생각 경찰”, “룸 101”, “뉴스피크”, “메모리 홀”, “더블씽크”, “생각 범죄”와 함께 영어에 정착되었다. 2008년, 더 타임즈(The Times)는 오웰을 1945년 이후 영국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작가로 선정했다.

일생

유년 시절

에릭 아서 블레어는 1903년 6월 25일 모티하리, 벵골 총독부(현재 비하르), 영국 인도에서 자신이 “하층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묘사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찰스 블레어는 부유한 노예 소유주인 시골 귀족이자 부재지주로 자메이카의 두 개 플랜테이션을 소유했다; 도르셋 출신인 그는 웨스트모랜드 8대 백작 토마스 페인의 딸인 레이디 메리 페인과 결혼했다. 그의 할아버지 토마스 리처드 아서 블레어는 앵글리칸 성직자였다. 오웰의 아버지는 리처드 월메슬리 블레어로, 인도 민정국(Indian Civil Service)의 아편 부서(Opium Department)에서 아편 부국장으로 근무하며 중국으로 수출되는 아편의 생산과 보관 감독을 담당했다. 오웰의 어머니 아이다 메이블 블레어(본명 리무진)는 버마의 뭄메인에서 자랐으며, 프랑스인 아버지가 투기 사업에 관여했다. 에릭은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마조리(5세 연상)와 아빌(5세 연하)이 있었다. 에릭이 1살 때 어머니는 그를 마조리와 함께 잉글랜드로 데려갔다.

1904년, 이다는 자녀들과 함께 옥스퍼드셔의 헨리-온-템스에 정착했다. 에릭은 어머니와 자매들과 함께 자랐으며, 1907년 중반의 짧은 방문을 제외하고는 1912년까지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5세 때 에릭은 헨리-온-템스의 수녀원 학교에 통학 학생으로 보내졌다. 그 학교는 프랑스 출신 우르술린 수녀들이 운영하는 가톨릭 수녀원 학교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공립 학교 교육을 원했지만, 가족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다의 형 찰스 리무진의 사회적 인맥을 통해 블레어는 이스트 서식스주 이스트본에 위치한 세인트 사이프리안스 학교에 장학금을 받아 입학했다. 1911년 9월에 도착한 그는 다음 5년간 기숙사에서 생활했으며, 휴가 때만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학비 감면 사실을 몰랐지만, “곧 자신이 가난한 가정 출신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블레어는 학교를 싫어했으며,] 수십 년 후 그곳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Such, Such Were the Joys”라는 에세이를 작성해 사후에 출판되었다. 세인트 사이프리아스에서 블레어는 작가로 활동한 시릴 콘리를 처음 만났으며, 그는 호라이즌의 편집장으로 오웰의 여러 에세이를 출판했다.
블레어의 세인트 사이프리아스 시절은 그의 에세이 “Such, Such Were the Joys”에 영감을 주었다.
이 에세이는 블레어가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사우스 다운스를 하이킹하고 비치 헤드의 바위 사이에서 목욕하는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 가족은 2마일(3km) 남쪽으로 옥스퍼드셔의 시플레이크로 이사했으며, 에릭은 버디컴 가족과 친해졌으며 특히 그들의 딸 자신타와 가까워졌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들판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서 있었다. 왜냐고 묻자 그는 “머리를 땅에 대고 서 있으면 정상적으로 서 있는 것보다 더 주목받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함께 자라면서 버디컴과 블레어는 이상주의적인 청소년 연인으로 성장해 시를 읽고 쓰며 유명한 작가로 성공하는 꿈을 꾸었다. 블레어는 자킨타의 형제와 자매와 함께 사격, 낚시, 새 관찰을 즐겼다.

세인트 사이프리아스 학교에 재학 중이던 블레어는 헨리 앤드 사우스 옥스퍼드셔 스탠더드에 두 편의 시가 게재되었다. 그는 콘놀리에게 이어 해로우 역사상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학교의 외부 평가관으로부터 작품이 칭찬받았고, 웰링턴과 에튼에 장학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튼 장학금 명단에 포함되었다고 해서 입학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고, 당장 입학할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그는 이튼에 입학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1916년 12월까지 세인트 사이프리안 학교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11세의 블레어가 제1차 세계 대전을 주제로 쓴 시 “Awake! Young Men of England”는 1914년에 Henley and South Oxfordshire Standard에 게재되었다.

1월, 블레어는 웰링턴에 입학해 봄 학기를 보냈다. 1917년 5월, 이튼의 킹스 스칼러 자리가 생겼습니다. 이 당시 가족은 노팅힐 게이트의 말 챔버스에 거주했다. 블레어는 18세와 19세 사이 중간에 이튼을 떠났다. 웰링턴은 “끔찍했다”고 블레어는 자신타에게 말했지만, 그는 이튼에서는 “흥미롭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의 주임 교사는 A. S. F. Gow로, 트리니티 칼리지, 케임브리지의 연구원이었으며, 그는 블레어의 경력 후반에 조언을 주었다.블레어는 Aldous Huxley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스티븐 런시먼은 블레어와 함께 이튼에 재학 중이었으며, 그와 동시대 학생들이 헉슬리의 언어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고 언급했다.

블레어의 성적 보고서는 그가 학업을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지만, 그는 로저 마이노스와 함께 대학 잡지 The Election Times를 제작했으며, 다른 출판물인 College Days와 Bubble and Squeak의 제작에도 참여했고, Eton Wall Game에 참가했다. 그의 부모는 다른 장학금 없이 대학에 보낼 수 없었으며, 그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장학금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런시먼은 그가 동양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언급했으며, 가족은 블레어가 인도 경찰 서비스의 전신인 제국 경찰에 입대하도록 결정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입학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1921년 12월, 그는 이튼을 떠나 은퇴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 달에 서포크주 사우스울드에 위치한 40 스트래드브로크 로드로 이사한 여동생 아빌과 합류했다. 이 집은 그들이 그 마을에서 살게 될 네 채의 집 중 첫 번째였다. 블레어는 그곳에 위치한 크레이허스트라는 보충 학원에 등록해 고전, 영어, 역사 과목을 복습했다. 그는 시험에 합격해 26명 중 7위를 차지했다.

버마의 경찰 업무

블레어의 모친의 할머니는 Moulmein에 거주했기 때문에, 그는 당시 영국 인도 제국의 한 주였던 버마로 배치를 선택했다. 1922년 10월, 그는 SS Herefordshire 호를 타고 버마의 인도 제국 경찰에 합류하기 위해 출항했다. 한 달 후, 그는 Rangoon에 도착해 Mandalay의 경찰 훈련 학교로 이동했다. 그는 1922년 11월 29일, 월급 Rs. 525를 받으며 임시 구역 부서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버마의 주요 산간 휴양지인 메이묘에서 짧은 근무를 마친 후, 1924년 초 이라와디 델타 지역의 국경 전초기지인 미아웅미아로 전근되었다.

제국 경찰관으로 근무하며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영국에서 대학에 재학 중이던 시절에 그는 상당한 책임을 맡았다. 델타 지역 동쪽으로 더 멀리 이동해 트완테에서 부구청장으로 임명되자, 그는 약 20만 명의 안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1924년 말, 그는 랑군에 가까운 시리아ム으로 전근되었다. 시리아ム에는 버마 오일 컴퍼니의 정제소가 있었으며, “주변 땅은 황산가스 연기로 인해 모든 식물이 죽은 황무지였다.” 하지만 그 마을은 다문화 항구 도시 랑군에 가까웠기 때문에 블레어는 가능한 한 자주 도시로 나가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고, 잘 조리된 음식을 먹고, 경찰 생활의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1925년 9월, 그는 인신(Insein)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인신 감옥(Insein Prison)의 소재지였다.  이 시점까지 블레어는 훈련을 마치고 월급 Rs. 740(수당 포함)을 받고 있었습니다.

블레어는 버마인들로부터 적대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결국 어디서나 나를 맞이하는 젊은 남성들의 비웃는 노란 얼굴들, 안전한 거리에서 나를 향해 날아오는 모욕적인 소리들이 내 신경에 심하게 거슬렸다.” 그는 “내가 섬기는 제국에 대한 증오와 내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악의적인 작은 짐승들에 대한 분노 사이에 갇혀 있었다”고 회상했다.

버마에서 블레어는 외지인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책을 읽거나, 카렌족의 교회에 참석하는 등 정통이 아닌 활동을 하며 보냈다. 동료 로저 비던은 블레어가 언어를 빠르게 배우는 데 능숙했으며, 버마를 떠나기 전에는 “버마 신부들과 ‘매우 화려한 버마어’로 유창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블레어는 버마에서 외모를 변경했으며, 이는 평생 유지되었다. 이 중에는 연필 모양의 수염을 기르는 것도 포함되었다. 엠마 라킨은 버마의 날들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버마에 머물던 시절, 그는 그곳에 주둔한 영국 군대 장교들이 착용하던 것과 유사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문신을 몇 개 새겼으며, 각 손가락 관절에 작은 어지러운 파란 원이 있었다. 농촌 지역에 사는 많은 버마인들은 여전히 이런 문신을 하고 있으며, 이는 총알과 뱀 물림으로부터 보호한다고 믿어진다.

1926년 4월 그는 모울메인으로 이사했다. 그곳에는 그의 모친의 할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해 말, 그는 상부 버마의 카타로 배속되었다. 1927년 그는 뎅기열에 걸렸다. 그 해 영국에서 휴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질병으로 인해 7월에 귀국을 허가받았다. 1927년 9월 가족과 함께 코르넬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그는 자신의 삶을 재평가했다. 버마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한 그는 1928년 3월 12일부로 인도 제국 경찰을 사임하고 작가로 전향했다. 그는 버마 경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버마의 날들 (1934)과 에세이 “A Hanging” (1931) 및 “Shooting an Elephant” (1936)를 집필했다.

런던과 파리

영국에서 그는 가족의 집인 사우스울드로 돌아가 현지 친구들과 재회하고 올드 에튼 동문 모임에 참석했다. 그는 작가로 활동하기 위해 조언을 구하기 위해 케임브리지의 옛 가정교사 고우를 방문했다. 1927년 그는 런던으로 이사했다. 루스 피터는 가족 지인으로, 그가 숙소를 찾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1927년 말까지 그는 포토벨로 로드의 방으로 이사했다; 그곳에 머문 것을 기념하는 파란색 기념판이 있다. 피터의 이사 과정에 대한 참여는 “블레어 부인의 눈에는 안심할 수 있는 존엄성을 부여했을 것이다”. 피터는 블레어의 글쓰기에 공감하며 그의 시의 약점을 지적하고, 자신이 아는 것을 쓰라고 조언했다. 실제로 그는 “현재의 특정 측면을 탐구하기로 결심”하고 런던의 동부 지역으로 모험을 떠났다. 이는 5년 동안 간헐적으로 진행된 빈곤과 빈민들의 세계를 탐험하는 첫 번째 탐방이었다.

잭 런던(Jack London)의 글을 존경했던 블레어(특히 The People of the Abyss)를 모방해, 그는 런던의 빈곤한 지역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탐험에서 그는 Limehouse Causeway로 향했으며, 첫 밤을 조지 레비(George Levy)의 “kip”으로 추정되는 공동 숙소에서 보냈다. 일정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나라에서 ‘원주민처럼’ 생활하며 거지처럼 옷을 입고 P.S. 버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이 저층 사회의 경험을 《The Spike》라는 첫 영어 에세이집과 첫 번째 책 《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1933)의 후반부에 기록했다.

1928년 초 그는 파리로 이사했다. 그는 5구의 노동자 계층 지역인 루 드 포 드 페르(Rue du Pot de Fer)에 살았다.] 그의 이모 엘렌(넬리) 케이트 리무진도 파리에서 살았으며(에스페란티스트 유제네 란티와 함께) 그에게 사회적 지원을 제공했고 필요할 때는 재정적 지원도 했다. 그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그 중에는 버마의 날들의 초기 버전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시기의 다른 작품은 남아 있지 않는다. 그는 기자로서 더 성공을 거두었으며, Monde라는 정치/문학 잡지에 기사를 게재했다. 이 잡지는 앙리 바르부스가 편집했으며, 그의 첫 번째 전문 작가로서의 기사인 “La Censure en Angleterre”는 1928년 10월 6일에 이 잡지에 게재되었다; G. K.’s Weekly에서 그의 첫 번째 영국 기사 “A Farthing Newspaper”가 1928년 12월 29일에 게재되었으며; 그리고 좌파 연합 Le Cartel des Gauches가 창간한 Le Progrès Civique에 세 편의 기사가 연속으로 게재되었다. 이 기사는 각각 실업 문제, 거지 한 날의 생활, 런던의 거지들에 대해 다뤘다. “빈곤은 그 파괴적인 형태 중 하나로서 그의 집착의 대상이 되었으며, Homage to Catalonia까지 그가 쓴 거의 모든 작품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그는 1929년 2월에 중병에 걸려 Hôpital Cochin이라는 무료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 병원은 의대생들이 실습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1946년 출판된 그의 에세이 “How the Poor Die”의 기반이 되었다(그는 병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 직후, 그는 숙소에서 모든 돈을 도둑맞았다. 필요에 의해든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든, 그는 rue de Rivoli에 위치한 고급 호텔에서 접시 닦기 같은 단순 노동을 했다. 이는 나중에 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에서 묘사되었다. 1929년 8월, 그는 “The Spike”의 사본을 런던의 John Middleton Murry가 편집한 New Adelphi 잡지에 보냈다. 이 잡지는 Max Plowman과 Sir Richard Rees가 편집했으며, Plowman은 이 작품을 출판하기로 결정했다.

사우스울드

사우스울드에 위치한 사우스울드 피어. 오웰은 이 마을에서 A Clergyman’s Daughter (1935)를 집필했으며, 소설 속 가상의 마을 Knype Hill을 부분적으로 사우스울드에서 모티프를 따서 창조했다.
1929년 12월, 파리에서 약 2년을 보낸 후 블레어는 잉글랜드로 돌아와 사우스울드에 위치한 부모님의 집으로 직접 갔다. 사우스울드는 서포크에 위치한 해안 마을로, 그는 다음 5년간 이곳을 기반으로 삼았다. 가족은 마을에서 잘 정착해 있었으며, 그의 여동생 아브릴은 티하우스를 운영했다. 그는 지역 주민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그 중에는 St Felix Girls’ School에서 체육 교사로 일하던 목사 딸 브렌다 살켈드가 있었다. 살켈드는 그의 결혼 제안을 거절했지만, 오랜 기간 친구이자 정기적인 편지 상대가 되었다. 그는 또한 데니스 콜링스 등 옛 친구들과의 우정을 재개했으며, 그의 여자친구 엘레노어 자크도 그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30년 초, 그는 여동생 마조리와 그녀의 남편 험프리 다킨과 함께 브램리, 리즈에서 잠시 머물렀다. 블레어는 아델피에 서평을 작성하며 사우스울드에서 장애를 가진 어린이의 개인 교사로 일했다. 이후 그는 세 명의 젊은 형제들의 교사가 되었으며, 그 중 한 명인 리처드 피터스는 나중에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

이 시기의 그의 삶은 이중성과 대비로 특징지어진다. 사우스울드의 부모 집에서 존경받는, 외적으로 평온한 삶을 살며 글을 쓰는 블레어가 있다. 반면, 빈곤과 절망의 시기에 버턴(그가 그 시기에 사용한 이름)으로 동네의 빈민가, 동부 지역, 길거리, 켄트의 호프밭에서 경험을 추구하는 블레어가 있다.

그는 해변에서 그림을 그리며 목욕을 했고, 그곳에서 메이블과 프랜시스 피어즈를 만났다. 이들은 나중에 그의 경력에 영향을 미쳤다. 다음 해 동안 그는 런던에서 그들을 방문했으며, 그들의 친구 맥스 플로우먼과 자주 만났다. 그는 또한 루스 피터와 리처드 리스의 집에서 머물며, 간헐적인 방랑 여행에 대비해 ‘변신’할 수 있었다. 그의 직업 중 하나는 하루에 반 크라운(두 실링과 식스펜스, 또는 파운드의 1/8)을 받는 숙소에서 가사 일을 하는 것이었다.

블레어는 이제 Adelphi에 정기적으로 기고했으며, “A Hanging”은 1931년 8월에 게재되었다. 1931년 8월부터 9월까지 그는 빈곤 탐구를 계속했으며, A Clergyman’s Daughter의 주인공처럼 East End의 전통에 따라 켄트 hop 농장에서 일했다. 그는 그곳에서의 경험을 일기로 기록했다. 그 후 그는 Tooley Street kip에 머물렀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부모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윈저 스트리트로 이사해 크리스마스까지 머물렀다. 에릭 블레어의 “Hop Picking”은 1931년 10월 New Statesman에 게재되었으며, 편집진에는 그의 옛 친구 사이릴 콘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메이블 피어즈는 그를 레너드 무어와 연결시켜주었으며, 그는 1932년 4월에 그의 문학 에이전트가 되었다.

이 시기 조나단 케이프는 A Scullion’s Diary(Down and Out의 첫 번째 버전)를 거부했다. 리처드 리스의 조언에 따라 그는 이를 파버 앤드 파버에 제출했지만, 그들의 편집장 T. S. 엘리엇도 이를 거부했다. 블레어는 그 해를 의도적으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크리스마스를 경험하기 위해 마무리했지만, 런던 동부 끝의 베스널 그린 경찰서로 연행된 후 당국은 그의 “취하고 소란스러운” 행동을 구금할 만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두 날 동안 감방에 머문 후 사우스울드로 돌아갔다.

교직 경력

1932년 4월 블레어는 런던 서부 헤이스에 위치한 남자 학교인 헤이스 고등학교(The Hawthorns High School)에서 교사로 임용되었다. 이 학교는 작은 사립 학교로, 10세에서 16세 사이의 소년 14명 또는 16명과 다른 교사 1명만이 재학 중이었다. 학교에 재직 중 그는 지역 교구의 부목사와 친분을 쌓고 그곳의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메이블 피어즈는 무어와 연락을 취했으며, 1932년 6월 말 무어는 블레어에게 빅터 골란츠가 자신의 최근 설립한 출판사 빅터 골란츠 리미티드를 통해 A Scullion’s Diary를 £40의 선불로 출판할 준비가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이 출판사는 급진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작품들을 출판하는 채널이었다.

1932년 여름 학기 종료 후 블레어는 부모가 유산으로 구입한 집으로 돌아갔다. 블레어와 그의 여동생 아빌은 집을 거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휴가를 보냈으며, 그는 동시에 《버마의 날들》을 집필했다. 그는 엘레노어 자크와 시간을 보냈지만, 그녀가 데니스 콜링스에 대한 애착은 그가 더 진지한 관계를 맺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필명 조지 오웰은 잉글랜드 서포크 주의 오웰 강에서 영감을 받았다.

“클링크”라는 에세이는 감옥에 보내지려는 실패한 시도를 묘사한 작품으로, 1932년 8월 호의 아델피에 게재되었다. 그는 헤이스에서 교직으로 돌아가 자신의 책, 현재 파리와 런던의 빈곤으로 알려진 작품의 출판을 준비했다. 그는 “트램프” 시절로 인해 가족에게 수치를 주지 않기 위해 다른 이름으로 출판하고 싶었습니다. 1932년 11월 15일 무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필명 선택을 무어와 골란츠에게 맡겼다. 4일 후, 그는 무어에게 편지를 보내 필명으로 P. S. 버튼(트램프 시절 사용한 이름), 케네스 마일스, 조지 오웰, H. Lewis Allways를 제안했다. 그는 결국 “좋은 영어 이름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필명 조지(George Orwell)을 채택했다. 조지(George)라는 이름은 잉글랜드의 수호성인에서, 오웰(Orwell)은 오웰(Orwell)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였던 서포크의 오웰(Orwell) 강에서 따왔다.

파리와 런던에서의 빈곤과 절망은 1933년 1월 9일 런던의 빅터 골란츠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세실 데이-루이스는 오웰의 “명확성과 합리성”을 칭찬했으며, The Times Literary Supplement는 오웰의 특이한 캐릭터를 디킨스의 캐릭터와 비교했다. Down and Out은 소규모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다음으로 뉴욕의 Harper & Brothers에서 출간되었다.

1933년 중반 블레어는 호스스에서 나와 런던 서부 우크브리지의 프레이스 칼리지에서 교사로 임용되었다. 이 학교는 200명의 학생과 완전한 교직원진을 갖춘 훨씬 큰 기관이었다. 그는 모터사이클을 구입하고 주변 시골을 여행했다. 이 중 한 번의 여행에서 그는 빗물에 흠뻑 젖어 감기에 걸렸고, 이는 폐렴으로 발전했다. 그는 옥스브리지의 cottage hospital로 옮겨졌고, 한때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1934년 1월에 퇴원 후 그는 사우스울드로 돌아가 회복을 위해 머물렀으며, 부모의 지원을 받아 교사 생활로 돌아가지 않았다.

골란츠가 버마의 날들을 출판을 거부했을 때 그는 실망했다. 주로 명예 훼손 소송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퍼는 미국에서 출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편 블레어는 소설 《A Clergyman’s Daughter》의 집필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그의 교사 생활과 사우스울드에서의 삶을 바탕으로 했다. 결국 10월에 《A Clergyman’s Daughter》를 무어에게 보낸 후, 그는 이모 넬리 리무진(Nellie Limouzin)이 찾아준 런던의 일자리를 위해 떠났다.

햄프스테드

이 일은 햄프스테드에 위치한 중고 서점 ‘Booklovers’ Corner’에서 프랜시스 웨스트로프와 마이판위 웨스트로프가 운영하는 곳에서 파트타임 보조원으로 일한 것이었다. 프랜시스 웨스트로프와 마이판위 웨스트로프는 넬리 리무진과 에스페란토 운동에서 친구였다. 웨스트로프 부부는 친절했으며, 그에게 워릭 맨션스, 폰드 스트리트에 편안한 숙소를 제공했다. 그는 웨스트로프 부부와 함께 살던 존 김체와 함께 일을 나누어 했다. 블레어는 오후에 서점에서 일했고, 아침은 글쓰기에, 저녁은 사회 활동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 경험들은 1936년 출간된 소설 Keep the Aspidistra Flying의 배경이 되었다. 웨스트로프 가족의 다양한 손님들 외에도 그는 리처드 리스와 《아델피》 작가들, 메이블 피어즈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웨스트로프 가족과 김치는 《독립 노동당》의 회원이었지만, 이 시점에는 블레어가 정치적으로 활발히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델피》에 기고하며 《목사의 딸》과 《버마의 날들》을 출판을 준비 중이었다.

1935년 초 워릭 맨션에서 이사해야 했던 그는 메이블 피어즈가 의회 언덕에 아파트를 찾아주었다. A Clergyman’s Daughter는 1935년 3월 11일에 출판되었다. 1935년 초 블레어는 미래의 아내 Eileen O’Shaughnessy를 만났다. 그의 집주인 로잘린드 오버마이어는 런던 대학교 대학원에서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 중이었으며, 동료 학생들을 파티에 초대했다. 이 학생 중 한 명인 엘리자베타 펜은 블레어와 그의 친구 리처드 리스가 벽난로 앞에 “드레이프”처럼 걸터앉아, 그녀가 생각하기에 “벌레 먹은 듯하고 조숙하게 늙어 보였다”고 회상했다. 이 무렵 블레어는 The New English Weekly에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6월, 《버마의 날들》이 출판되었고, 사이릴 콘리(Cyril Connolly)가 《뉴 스테이츠맨》(New Statesman)에 게재한 긍정적인 서평은 블레어가 옛 친구와 다시 연락을 취하게 만들었다. 8월, 그는 켄티시 타운(Kentish Town)의 로포드 로드 50번지(50 Lawford Road)에 위치한 아파트로 이사했으며, 이 곳은 마이클 세이어스(Michael Sayers)와 레이너 헤펜스탈(Rayner Heppenstall)과 함께 공유했다. 이 관계는 때로는 어색했으며 블레어와 헤펜스탈은 심지어 싸우기도 했지만, 그들은 친구로 남았고 나중에 BBC 방송에서 함께 작업했다. 블레어는 이제 《Keep the Aspidistra Flying》을 작업 중이었으며, 《News Chronicle》에 연재물을 쓰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935년 10월까지 그의 룸메이트들은 이사갔고, 그는 혼자서 임대료를 내기 어려워졌다. 그는 1936년 1월 말까지 머물렀으며, 그 후 Booklovers’ Corner에서의 일을 그만두었다. 1980년, English Heritage는 오웰에게 켄티시 타운의 거주지에 블루 플래크를 수여했다.

위건 피어로 가는 길

이 시점, 빅터 골란츠는 오웰에게 경제적으로 침체된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 사회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짧은 기간 머물러보라고 제안했다. 대공황은 잉글랜드 북부의 노동자 계층 작가들을 독서 대중에게 소개했다. 오웰이 조언을 구한 노동자 계층 작가 중 한 명은 잭 힐튼이었다. 오웰은 힐튼에게 숙소를 요청하고 여행 경로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힐튼은 숙소를 제공할 수 없었지만, 로치데일 대신 위건으로 가라고 제안했다. “그곳에는 광부들이 있고 그들은 좋은 사람들입니다.”

1936년 1월 31일, 오웰은 대중교통과 걸어서 출발했다. 은행이 문을 닫은 후 맨체스터에 도착한 그는 공동 숙소에서 머물러야 했다. 다음 날 그는 리처드 리스가 보낸 연락처 목록을 받았고, 그 중 한 명인 노동조합 간부 프랭크 미드는 위건을 추천했다. 오웰은 2월 동안 내장 고기 가게 위의 더러운 숙소에서 머물렀다. 위건에서 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기 위해 많은 집을 방문했고, 브린 홀 석탄 광산을 내려갔으며, 현지 공공 도서관에서 공공 보건 기록과 광산 작업 조건에 대한 보고서를 참고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Keep the Aspidistra Flying의 스타일과 명예 훼손 가능성에 대한 우려로 인해 방해받았다. 그는 리버풀을 짧게 방문했고, 3월에는 사우스 요크셔에 머물며 셰필드와 바른슬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광산 방문(그리메스퍼프 포함)과 사회적 조건 관찰 외에도 그는 공산당 회의와 오스왈드 모즐리(“그의 연설은 평소와 같은 헛소리—모든 책임은 신비로운 국제 유대인 단체에 돌렸다”)의 집회에 참석해 블랙셔츠의 전술을 목격했다. 그는 헤딩리에서 여동생을 방문했으며, 이 기간에 호워스의 브론테 목사관도 방문했다.

오웰은 책 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고, 다시 한 번 도움은 헤르트포드셔의 월링턴에 위치한 16세기 작은 집인 “스토어스”에 살고 있던 이모 넬리로부터 제공되었다. 오웰은 세입권을 인수하고 1936년 4월 2일에 이사했다. 그는 4월 말까지 《더 로드 투 위건 피어》 작업에 착수했지만, 정원 작업에도 수 시간을 할애해 장미 정원을 심었으며, 4년 후 “일 외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원 가꾸기, 특히 채소 가꾸기”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스토어를 마을 가게로 재개장하는 가능성을 탐색했다. Keep the Aspidistra Flying은 1936년 4월 20일 Gollancz에서 출판되었다. 8월 4일, 오웰은 랭엄에서 열린 아델피 여름 학교에서 An Outsider Sees the Distressed Areas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이 학교에서 강연한 다른 인물로는 존 스트래치, 맥스 플로우먼, 칼 폴라니, 레인홀드 니부르가 있었다.
그의 북부 지역 여행의 결과물은 1937년 골란츠 출판사에서 좌파 도서 클럽을 위해 출간된 《위건 피어로 가는 길》이다. 이 책의 첫 번째 부분은 랭커셔와 요크셔에서의 사회 조사 기록으로, 석탄 광산에서의 노동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 부분은 그의 성장 과정과 정치적 의식의 형성에 대한 장문의 에세이로,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논쟁이 포함되어 있다. 골란츠는 두 번째 부분이 독자들을 자극할까 우려해 오웰이 스페인에 머물고 있을 때 책에 해명 서문을 추가했다. 《위건 피어로 가는 길》의 연구는 1936년부터 오웰이 특별 부서(Special Branch)의 감시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웰은 1936년 6월 9일 오샤ughnessy와 결혼했다. 그 직후 스페인에서 정치적 위기가 시작되었고, 오웰은 그 상황을 밀접하게 주시했다. 연말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군사 쿠데타에 우려를 느낀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공화당 측에서 참여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국경을 넘기 위해 어떤 좌파 조직의 서류가 필요하다는 잘못된 정보에 따라, 존 스트래치(John Strachey)의 추천으로 영국 공산당 지도자 해리 폴리트(Harry Pollitt)에게 신청했지만 실패했다. 폴리트는 오웰의 정치적 신뢰성에 의문을 품고, 국제 여단 가입을 약속할 것인지 물으며 파리의 스페인 대사관에서 안전 통행증을 취득하라고 조언했다. 현지의 상황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결정을 미루고 싶었던 오웰은 대신 독립 노동당(Independent Labour Party)의 연락처를 통해 바르셀로나의 존 맥내어(John McNair)에게 소개서를 받았다.

스페인 내전

오웰은 1936년 12월 23일경 스페인으로 향했으며, 그 길에 파리에서 헨리 밀러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밀러는 오웰에게 내전에 참전하는 것이 의무감이나 죄책감에서 나온 것이라면 “순수한 어리석음”이며, 영국인의 “파시즘과 싸우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등등의 생각은 모두 헛소리”라고 말했다. 며칠 후 바르셀로나에서 오웰은 독립 노동당(ILP) 사무소의 존 맥내어를 만났다. 공화당 정부는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당(POUM), 아나르코-시니칼리스트 전국 노동자 연합(CNT), 카탈루냐 통일 사회당(스페인 공산당의 한 분파) 등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진 여러 파벌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오웰은 이 “만화경 같은” 정치 정당과 노동조합의 혼란에 처음에는 짜증을 냈다. ILP는 POUM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웰은 POUM에 가입했다.

바르셀로나의 레닌 병영에서 일정 기간 머문 후, 그는 조르주 코프의 지휘 하에 비교적 조용한 아라곤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1937년 1월, 그는 해발 1,500피트(460m)에 위치한 알쿠비에레에 도착했다. 겨울의 한복판이었고, 군사 행동은 거의 없었으며, 오웰은 탄약, 식량, 연료 부족과 다른 극심한 결핍에 충격을 받았다. 카데트 부대와 경찰 훈련 경험을 바탕으로 오웰은 빠르게 하사로 승진했다. 약 3주 후 영국 ILP 부대가 도착하자 오웰과 다른 영국 민병대원 윌리엄스는 그들과 함께 몬테 오스쿠로로 이동한 후 후에스카로 향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이ileen이 The Road to Wigan Pier의 출판 관련 문제를 처리한 후 스페인으로 떠났고, 넬리 리무진이 The Stores를 관리하게 되었다. 이린은 존 맥네어 사무실의 직책을 자원했으며, 조지 코프의 도움을 받아 남편을 방문해 영국 차, 초콜릿, 시가를 전달했다. 오웰은 중독된 손으로 인해 몇 일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으며, 대부분의 소유물을 직원들에게 도난당했다. 그는 전선으로 돌아가 국민군 참호에 대한 야간 공격에서 적 병사를 칼로 쫓고 적의 소총 진지를 폭탄으로 공격하는 전투에 참여했다.

4월, 오웰은 바르셀로나로 돌아갔다. 마드리드 전선으로 파견되기를 원했던 그는 “국제 부대에 가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스페인 의료 지원단에 소속된 공산당 친구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공산당에 대해 큰 신뢰는 없었지만, 오웰은 여전히 그들을 친구와 동지로 대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곧 변할 것입니다.” 바르셀로나 5월 사건 동안 오웰은 파벌 간 전투에 휘말렸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지붕 위에서 소설 더미를 쌓아놓고 보냈지만, 햄프스테드 시절의 친구 존 김체와 재회했다. 공산당 언론이 POUM이 파시스트와 협력했다는 거짓과 왜곡의 캠페인을 벌인 것은 오웰에게 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제 여단(International Brigades)에 합류할 계획이었지만, 그는 아라곤 전선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5월 전투가 끝난 후, 공산당 친구가 그에게 여전히 국제 여단으로 이동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오웰은 공산당 언론에 따르면 자신이 파시스트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여전히 그를 원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전선으로 돌아온 후, 그는 저격수의 총탄에 목을 맞았다. 6피트 2인치(1.88m)의 키로 스페인 전투원들보다 훨씬 컸던 오웰은 참호 벽에 서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었다. 말을 할 수 없었고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자, 그는 들것에 실려 시에타모로 옮겨졌고 구급차에 실려 레이다의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충분히 회복되어 일어나 1937년 5월 27일 타라고나로 이동했으며, 이틀 후 바르셀로나 교외의 POUM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총알은 주요 동맥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으며, 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총알이 너무 정확히 맞았기 때문에 상처는 즉시 소독 과정을 거쳤다. 그는 전기 치료를 받았으며, 의료적으로 복무 불가 판정을 받았다.

6월 중순까지 바르셀로나의 정치적 상황은 악화되었고, 소련 친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트로츠키주의 조직으로 묘사된 POUM은 불법화되고 공격을 받았다. 코프를 포함한 회원들이 체포되었고 다른 이들은 숨어 지냈다. 오웰과 그의 아내는 위협을 받고 숨어 지내야 했지만, 코프를 돕기 위해 숨어 지내는 것을 깨고 나왔다. 그들은 결국 기차로 스페인에서 탈출했다. 1937년 7월 첫 주에 오웰은 월링턴으로 돌아왔고, 1937년 7월 13일 발렌시아의 간첩 및 반역 재판소에 오웰 부부에 대한 고발장이 제출되었다. 고발 내용은 “광적인 트로츠키주의”와 POUM의 간첩 활동이었다. POUM 지도부와 오웰(부재 중)의 재판은 1938년 10월과 11월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다. 프랑스 모로코에서 사건을 관찰한 오웰은 이 사건들이 “러시아 트로츠키주의 재판의 부수적 산물일 뿐이며, 처음부터 공산당 언론을 통해 명백한 허위 주장까지 모든 종류의 거짓말이 유포되었다”고 썼다. 오웰의 스페인 내전 경험은 카탈루냐에 대한 찬사 (1938)를 탄생시켰다.
길레스 트렐렛의 책 《국제 여단: 파시즘, 자유, 그리고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 문서에 따르면 오웰과 그의 아내 이린은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감시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휴식과 회복
오웰은 1937년 6월에 잉글랜드로 돌아와 그린위치에 위치한 오샤ughnessy 가정에 머물렀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후안 라몬 브레아와 메리 스탠리 로우가 쓴 Red Spanish Notebook: the first six months of revolution and the civil war에 대한 리뷰에서 이 책을 칭찬했다. 킹슬리 마틴은 오웰의 두 작품을 거부했고, 골란츠도 마찬가지로 신중했다. 동시에 공산당 계열의 《데일리 워커》는 《위건 피어로 가는 길》에 대한 공격을 게재했는데, 오웰이 “노동자 계급은 냄새가 난다”고 쓴 부분을 맥락에서 벗어나 인용했다. 오웰이 골란츠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위협하는 편지가 도착하자 이 공격은 중단되었다. 오웰은 자신의 견해에 더 공감하는 출판사인 프레드릭 워버그의 세커 앤 워버그에서 출판사를 찾을 수 있었다. 오웰은 부재 중 혼란에 빠진 월링턴으로 돌아갔다. 그는 염소, 헨리 포드라고 이름 지은 수탉, 마르크스라고 이름 지은 푸들 강아지를 구입했으며, 동물 사육과 《카탈루냐에 대한 찬양》 집필에 몰두했다.

인도 루크나우의 신문 《The Pioneer》에서 일하기 위해 인도행 계획을 세웠지만, 1938년 3월까지 오웰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그는 형수인 로렌스 오샤ughnessy가 소속된 영국 레지언 병원이었던 켄트 주 에일스포드의 프레스턴 홀 산atorium에 입원했다. 처음에는 결핵으로 진단받았으며, 9월까지 산atorium에 머물렀다. 카탈루냐에 대한 헌사는 런던의 세커 앤 워버그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지만 상업적 실패를 겪었다. 이 작품은 오웰의 후속 작품들의 성공에 힘입어 1950년대 재출간되었다.

소설가 L. H. 마이어스는 오웰이 영국의 겨울을 피하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 모로코로 반년간의 여행을 비밀리에 후원했다. 오웰 부부는 1938년 9월 지브롤터와 탕헤르를 경유해 스페인 모로코를 피하고 마라케시에 도착했다. 그들은 카사블랑카로 가는 길에 별장을 임대했으며, 그 기간 동안 오웰은 《Coming Up for Air》를 집필했다. 그들은 1939년 3월 30일 영국으로 돌아왔고, 《Coming Up for Air》는 6월에 출판되었다. 오웰은 월링턴과 사우스울드에서 찰스 디킨스에 대한 에세이를 작성하며 시간을 보냈다. 1939년 6월, 오웰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동물 농장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웰의 아내 이린은 런던 중심부의 정보부 검열국에서 근무하기 시작했으며, 주중에는 그린위치에 있는 가족과 함께 머물렀다. 오웰은 전쟁 업무를 위해 중앙 등록부에 이름을 등록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그는 월링턴으로 돌아가 1939년 말에 첫 에세이집 Inside the Whale의 원고를 작성했다. 다음 1년간 그는 《The Listener》, 《Time and Tide》, 《New Adelphi》 등에 연극, 영화, 책 리뷰를 작성하며 바쁘게 지냈다. 1940년 3월 29일, 그는 《Tribune》과의 장기적인 협업이 시작되었다. 이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철수 기록을 쓴 한 상사의 회고록 리뷰로 시작되었다. 1940년 초, 콘놀리의 《Horizon》 첫 번째 판이 출간되었고, 이는 오웰의 작품에 새로운 발표 채널과 문학적 인맥을 제공했다. 5월, 오웰 부부는 런던 메리레본의 도르셋 체임버스, 차그포드 스트리트에 위치한 아파트를 임대했다. 이는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진행 중이던 시기였으며, 이ileen의 형인 로렌스 오샤ughnessy가 플랜더스에서 사망해 그녀에게 큰 슬픔과 장기적인 우울증을 안겨주었다.

오웰은 6월 의료위원회로부터 “어떤 종류의 군사 서비스에도 부적격”이라는 판정을 받았지만, 곧 홈 가드에 가입했다. 그는 홈 가드를 혁명적 인민 민병대로 보는 톰 윈트링엄의 사회주의적 비전을 공유했다. 그의 소대원 교육 강연 노트에는 거리 전투, 야전 요새화, 박격포 사용에 대한 조언이 포함되어 있다. 오웰 상사는 프레드릭 워버그를 자신의 부대에 모집했다. 영국 공중전(Battle of Britain) 기간 동안 그는 워버그와 새로운 시온주의 친구 토스코 피블과 함께 버크셔 주 트와이포드에 있는 워버그의 집에서 주말을 보냈다. 월링턴에서는 “England Your England” 작업을 했고, 런던에서는 잡지에 리뷰를 작성했다. 이ileen의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그린위치로 갔을 때, 그는 독일의 블리츠 폭격의 영향을 직접 목격했다. 1940년 그는 BBC의 인도 부서에서 프로듀서로 근무했으며, 방송인 겸 작가인 베누 치탈레가 그의 비서로 근무했다. 1940년 중반, 워버그, 피블, 오웰은 ‘서치라이트 북스’를 계획했다. 총 11권이 출판되었으며, 그 중 오웰의 《The Lion and the Unicorn: Socialism and the English Genius》는 1941년 2월에 첫 번째로 출간되었다.

1941년 초 그는 미국 《파르티잔 리뷰》에 기고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오웰을 반스탈린주의자였던 뉴욕 지성인들과 연결시켰다. 그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을 배경으로 작성된 골란츠 앤솔로지 《좌파의 배신》에 기고했다. 그는 공군부 직위에 지원했지만 실패했다. 한편, 그는 여전히 책과 연극의 서평을 작성하며 소설가 안소니 포웰을 만났다. 그는 BBC 동부 서비스의 라디오 방송에 참여했다. 3월, 오웰 부부는 세인트 존스 우드의 랭포드 코트 7층 아파트로 이사했으며, 월링턴에 머물던 오웰은 감자 심기로 ‘승리를 위한 노동’에 참여했다.
“우리 시대의 도덕적·감정적 얕음을 보여주는 더 좋은 예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모두 더나 덜 스탈린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 역겨운 살인자가 일시적으로 우리 편에 서자, 숙청 등 모든 것이 갑자기 잊혀졌습니다.”
— 조지 오웰, 전쟁 중 일기, 1941년 7월 3일


1941년 8월, 오웰은 BBC 동부 서비스에 정규직으로 채용되어 드디어 “전쟁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나치 독일의 제국 연계를 약화시키기 위한 선전을 반박하기 위해 인도로 향하는 문화 방송을 감독했다.

8월 말, 그는 H. G. 웰스와 저녁 식사를 했지만, 웰스가 오웰이 Horizon 기사에서 그에 대해 한 발언에 화를 내며 다툼으로 번졌다. 10월, 오웰은 기관지염을 앓았으며, 이 병은 자주 재발했다. 데이비드 애스터는 The Observer 일요신문에 도발적인 기고자를 찾고 있었고, 오웰에게 기고해 달라고 초대했다. 첫 기사는 1942년 3월에 게재되었다. 1942년 초 에일린은 식품부로 직장을 옮겼고, 1942년 중반 오웰 부부는 마이더 밸/킬번의 10a 모티머 크레센트에 더 큰 아파트로 이사했다.

BBC에서 오웰은 인도 방송을 위한 문학 프로그램 《Voice》를 소개했으며, 이 시점에는 문학 친구들과 특히 정치적 좌파 진영에서 활발한 사회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42년 말 그는 노동당 의원 아네루인 베반과 조지 스트라우스가 편집한 좌파 주간지 《Tribune》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기 시작했다. 1943년 3월, 오웰의 어머니가 사망했으며, 이 무렵 그는 무어에게 책 집필을 시작했다고 밝혔는데, 이 작품이 바로 동물 농장이었다.

1943년 9월, 오웰은 BBC에서 사직했다.  이는 인도인들이 방송을 거의 듣지 않는다는 보고서가 확인된 데 따른 것이었으며, 동시에 동물 농장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1943년 11월 24일, 복무 마지막 날 6일 전, 그가 각색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황제의 새 옷》이 방송되었다. 이는 그가 크게 관심을 가졌던 장르로, 《동물 농장》의 표지에도 등장했다.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홈 가드에서 사임했다.

1943년 11월, 오웰은 《트리뷴》의 문학 편집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보조 편집자는 친구인 존 김체였다. 오웰은 1945년 초까지 편집부에서 근무하며 80편 이상의 서평을 작성했으며, 1943년 12월 3일에는 정기 칼럼 《As I Please》를 시작했다. 그는 《파르티잔 리뷰》, 《호라이즌》, 《뉴욕 네이션》 등 다른 잡지에도 서평을 기고했다. 1944년 4월까지 《동물 농장》은 출판 준비가 완료되었다. 골란츠는 이 책을 소련 정권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출판을 거부했다. 소련은 전쟁 중 중요한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출판사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며, T. S. 엘리엇이 소속된 파버 앤드 파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조나단 케이프가 출판을 동의했다.

오웰과 이린은 아이를 원했지만, 그는 불임이었고 그녀도 자궁암으로 인해 불임일 가능성이 있었다. 5월, 이린의 시누이인 뉴캐슬 어폰 타인에서 의사였던 그웬 오샤ughnessy의 소개로 오웰 부부는 아이를 입양할 기회를 얻었다. 6월, V-1 비행 폭탄이 모티머 크레센트에 떨어지자 오웰 부부는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했다. 오웰은 월링턴에서 옮겨온 책을 잔해 속에서 찾아내야 했고, 손수레에 실어 옮겼다. 또 다른 타격은 케이프가 《동물 농장》 출판 계획을 번복한 것이었다. 이 결정은 정보부 관료인 피터 스몰렛을 방문한 후 내려졌다. 스몰렛은 나중에 소련 간첩으로 밝혀졌다. 오웰 가족은 카를턴 근처 더럼 카운티의 북동부 지역에서 소년 리처드 호레이쇼 블레어를 입양하는 문제를 처리했다. 1944년 9월까지 그들은 이즐링턴의 캐논버리 스퀘어 27b에 새 집을 마련했다. 베이비 리처드가 그들과 합류했고, 이린은 식량부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가족을 돌보기로 했다. 세커 앤 워버그(Secker & Warburg)는 다음 해 3월 출간을 계획한 《동물 농장》의 출판을 동의했지만, 이 책은 1945년 8월에야 인쇄되었다. 1945년 2월 데이비드 애스터(David Astor)는 오웰을 《더 옵저버》(The Observer)의 전쟁 특파원으로 초청했다. 그는 해방된 파리로 갔다가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이동해 쾰른과 슈투트가르트 등 도시를 방문했다. 그는 전선에서 총격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부대들을 밀접하게 따라다니며 “도시가 함락된 지 하루 만에 시체가 거리 곳곳에 널려 있는 상태로 점령된 도시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일부 보고서는 《맨체스터 이브닝 뉴스》에 게재되었다.

그가 그곳에 머물던 중, 이린은 자궁적출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그녀는 수술 비용에 대한 걱정과 빠른 회복을 기대했기 때문에 오웰에게 수술에 대해 많이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1945년 3월 29일 마취제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으로 사망했다. 그는 9개월 된 입양한 아들을 포기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웰은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갔다. 그는 1945년 7월 초 런던으로 돌아가 총선을 취재했다. 동물 농장: 동화는 1945년 8월 17일 영국에서, 1946년 8월 26일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주라와 1984

동물 농장은 전후 분위기에서 특별한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세계적인 성공으로 오웰은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다음 4년간 오웰은 주로 트리뷴, 더 옵저버, 맨체스터 이브닝 뉴스 등 언론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소규모 정치 및 문학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가장 유명한 작품인 1984를 집필했으며, 이 작품은 1949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소호에 위치한 레스토랑 이름을 딴 ‘상하이 클럽’이라는 좌파 성향의 망명 기자 그룹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으며, 이 그룹에는 E. H. 카, 세바스티안 하프너, 아이작 데우처, 바바라 워드, 존 김체 등이 포함되었다.

에일린의 사망 다음 해에 그는 약 130편의 기사와 《비평 에세이》의 선집을 출판했으며, 다양한 정치적 로비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이즐링턴의 아파트에서 입양한 아들을 돌보기 위해 가정부 수잔 워슨을 고용했다. 방문객들은 이 아파트를 “음울하다”고 묘사했다. 9월에는 내해 헤브리디스 제도의 주라 섬에서 2주 동안 머물며 런던의 문단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데이비드 애스터는 오웰이 주라에 머물 수 있도록 주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애스터의 가족은 해당 지역에서 스코틀랜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같은 에튼 출신인 로빈 플레처도 섬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1945년 말과 1946년 초, 오웰은 셀리아 키어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앤 포햄; 그리고 Horizon 사무실에서 콘놀리의 동료였던 소니아 브라운넬 등 젊은 여성들에게 희망 없는 결혼 제안을 여러 차례 했다. 오웰은 1946년 2월에 결핵성 출혈을 겪었지만 병을 숨겼다. 1945년이나 1946년 초, 캐논버리 스퀘어에 거주하던 오웰은 영국 문화원(British Council)의 의뢰로 “영국 요리”에 관한 기사(레시피 포함)를 작성했다. 전후 물자 부족으로 인해 양측은 출판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그의 여동생 마조리(Marjorie)는 5월에 사망했다.

1946년 5월 22일, 오웰은 두 살 된 아들을 미니 성인처럼 대하며 바른힐의 버려진 농장집인 주라로 이사했다. 농장집의 조건은 원시적이었지만, 자연사 연구와 장소를 개선하는 도전이 오웰에게 매력적이었다. 그의 아들은 나중에 오웰이 포옹이나 키스로 결핵을 전염시킬까 두려워했으며, 이것이 아이와의 유대감을 방해할까 걱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웰은 1946년 말 런던으로 돌아가 문학적 저널리즘 활동을 재개했다. 이제 유명한 작가로 자리 잡은 그는 업무로 바빴다. 새해에 주라를 방문한 것을 제외하면, 기록상 가장 추운 영국 겨울 중 하나를 런던에서 보냈으며, 연료 부족으로 가구와 아이의 장난감을 태워야 했다.

1956년 청정 공기법(Clean Air Act) 이전의 심각한 스모그는 그의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그는 건강 문제에 대해 말을 아끼고 의료적 도움을 피했다. 한편, 그는 출판사 골란츠와 워버그 사이의 출판권 분쟁을 해결해야 했다. 이 무렵 그는 레지널드 레이놀즈와 함께 British Pamphleteers라는 제목의 책집을 공동 편집했다. 《동물 농장》의 성공으로 인해 오웰은 내국세청으로부터 큰 세금 고지서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고, 회계 사무소에 연락했다. 해당 사무소는 오웰에게 저작권을 소유하고 로열티를 수령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하고,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서비스 계약’을 체결할 것을 조언했다. 이에 따라 ‘조지 오웰 프로덕션스 리미티드’ (GOP Ltd)가 1947년 9월 12일에 설립되었다. 오웰은 1947년 4월 10일 런던을 떠나 주라로 갔다. 7월에 그는 월링턴의 별장 임대 계약을 종료했다. 주라로 돌아온 그는 《1984》를 집필했다. 그 기간 동안 그의 여동생 가족이 방문했으며, 오웰은 8월 19일 코리브레칸 해협을 건너려다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재앙적인 보트 여행을 이끌었다. 이 사고로 그는 건강에 해로운 젖은 상태가 되었다. 12월 글래스고에서 소환된 흉부 전문의는 오웰이 중병에 걸렸다고 진단했으며, 1947년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그는 헤어마이어스 병원에 입원했다. 결핵이 진단되었고, 오웰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약물 스트렙토마이신을 수입하기 위한 허가 요청은 당시 보건부 장관인 아네루인 베반까지 전달되었다. 데이비드 애스터가 공급과 결제 지원을 했고, 오웰은 1948년 2월 19일 또는 20일에 스트렙토마이신 치료를 시작했다. 1948년 7월 말까지 오웰은 주라로 돌아갈 수 있었고, 12월까지 《1984》의 원고를 완성했다. 1949년 1월, 매우 약한 상태로 글로스터셔의 크랜험에 위치한 요양원으로 떠났다. 그러나 스트렙토마이신 치료를 계속할 수 없었으며, 그는 희귀한 부작용인 독성 표피 괴사증(toxic epidermal necrolysis)을 발병했다.

크랜험의 요양원은 스트라우드 근처 코츠월즈의 외딴 지역에 위치한 작은 목조 채소나 오두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문자들은 오웰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으며 치료의 부족함과 효과 부족에 대해 우려했다. 친구들은 그의 재정 상황을 걱정했지만, 이 시점에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였다. 그는 많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으며, 그 중에는 그를 ‘재발견’한 자신타 버디컴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9년 3월, 그는 노동당 정부가 반공주의 선전물을 출판하기 위해 설립한 외무부 산하 정보 연구 부서(IRD)에서 근무를 시작한 셀리아 키르완의 방문을 받았다. 오웰은 IRD 작가로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인물 목록을 그녀에게 전달했는데, 이 목록에는 공산주의 성향을 가진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웰의 목록은 2003년에야 공개되었으며, 주로 작가들과 일부 배우, 노동당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동물 농장(Animal Farm)을 더욱 홍보하기 위해 IRD는 노먼 펫이 그린 만화 스트립을 전 세계 신문에 게재하도록 의뢰했다. 오웰은 스트렙토마이신 치료를 추가로 받았으며 상태가 약간 호전되었다. 이 스트렙토마이신 재투여, 특히 부작용이 발견된 후의 투여는 “부적절한 결정”으로 평가되었다. 그는 기관지확장증을 치료하기 위해 페니실린을 투여받았지만, 의사들은 이 약이 결핵에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49년 6월 《1984》가 출판되어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최후의 달들과 죽음

오웰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1949년 중반, 그는 Nineteen Eighty-Four의 주인공 줄리아의 모델로 추정되는 소니아 브라운렐과 교제했으며, 9월에 약혼을 발표했다. 그 직후 그는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으로 옮겨졌다. 소니아는 오웰의 일을 맡아 병원에서 성실히 돌보았다. 오웰의 친구들은 브라운이 그의 고통스러운 마지막 달을 돕고, 앤서니 포웰에 따르면 오웰을 크게 위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녀가 주로 그의 명성 때문에 그에게 끌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1949년 9월, 오웰은 회계사 잭 해리슨을 병원으로 초대했으며, 해리슨은 오웰이 그에게 GOP Ltd의 대표이사가 되어 회사를 관리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독립적인 증인은 없다. 오웰의 결혼식은 1949년 10월 13일 병실 내에서 데이비드 애스터가 주례로 참석해 진행되었다. 회계사와의 추가 회의가 열렸으며, 이 회의에서 해리슨과 블레어 부부가 회사의 이사로 확정되었다. 오웰의 건강은 크리스마스까지 다시 악화되었다. 해리슨은 나중에 방문해 오웰이 그에게 회사 지분 25%를 주었다고 주장했다.
46세에 오웰은 결핵 합병증으로 인해 폐동맥 파열을 겪고 1950년 1월 21일 새벽에 사망했다.

오웰은 사망한 장소 근처의 가장 가까운 교회 묘지에 영국 국교회의 예식에 따라 안장되기를 요청했다. 런던 중심부의 묘지에는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유족은 친구들에게 교회 묘지에 공간이 있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다. 데이비드 애스터는 오웰을 서튼 코트네이의 올 세인트스 교회 묘지에 안장하도록arranged했습니다.[151] 장례식은 앤서니 파월과 말콤 머거리지드가 주관했다. 파월은 찬송가로 “All people that on earth do dwell”, “Guide me, O thou great Redeemer”, “Ten thousand times ten thousand”을 선택했다.

오웰의 양자 리처드 호라티오 블레어는 오웰의 여동생 아빌과 그녀의 남편 빌 던에 의해 양육되었다.

1979년, 소니아 브라운렐은 해리슨이 회사 지분 25%를 세 자녀에게 분할할 의도를 밝히자 고등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소니아에게 이 조치의 결과는 회사 전체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이 세 배 더 어려워질 것이었다. 그녀는 강력한 소송 근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결국 1980년 11월 2일 법원 밖에서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녀는 1980년 12월 11일,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문학적 업적과 유산

오웰은 경력 대부분을 저널리즘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었으며, 에세이, 서평, 신문과 잡지의 칼럼, 그리고 보고서 형식의 책들에서 활약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파리와 런던의 빈곤 (이 도시들에서의 빈곤 생활을 묘사한 작품), 위건 피어로 가는 길 (영국 북부의 빈곤층의 생활 조건과 계급 분열을 다룬 작품), 그리고 카탈루냐에 대한 찬가가 있다. 아이링 하우에 따르면, 오웰은 “해즐릿 이후, 아마도 존슨 박사 이후로 가장 뛰어난 영어 에세이스트”였다.

현대 독자들은 오웰을 주로 소설가로 접하게 되며, 특히 그의 엄청난 성공을 거둔 《동물 농장》과 《1984》를 통해 알게 된다. 전자는 러시아 혁명 후 소련의 쇠퇴와 스탈린주의의 부상을 반영한다고 여겨지며, 후자는 전체주의 통치 하에서의 삶을 묘사한다. 1984년, 《1984》와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는 디스토피아 문학에 대한 기여로 프로메테우스 상을 수상했다. 2011년에는 《동물 농장》으로 다시 한 번 이 상을 수상했다. 2003년, 《1984》는 BBC의 《The Big Read》 투표에서 8위, 《동물 농장》은 46위에 올랐습니다. 2021년, 《뉴욕 타임스 북 리뷰》 독자들은 《1984》를 “지난 125년간 최고의 책” 목록에서 3위로 선정했다.

문학적 영향

1940년 오웰이 Twentieth Century Authors 편집진에게 보낸 자전적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결코 지치지 않는 작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셰익스피어, 스위프트, 필딩, 딕킨스, 찰스 리드, 플로베르, 그리고 현대 작가 중에서는 제임스 조이스, T. S. 엘리엇, D. H. 로렌스입니다. 하지만 현대 작가 중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W. 소머셋 모엄입니다. 그는 이야기를 단순하고 화려하지 않게 전달하는 능력 때문에 제가 매우 존경하는 작가입니다.

다른 곳에서 오웰은 잭 런던의 작품, 특히 그의 책 The Road를 강력히 칭찬했습니다. 오웰의 The Road to Wigan Pier에서 빈곤에 대한 조사 방법은 잭 런던의 The People of the Abyss와 매우 유사한다. 이 책에서 미국 기자인 런던은 실업자 선원으로 변장해 런던의 빈민층의 삶을 조사했다. 그의 에세이 “Politics vs. Literature: 걸리버의 여행에 대한 검토” (1946)에서 오웰은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모든 책이 파괴될 때 보존해야 할 여섯 권의 책을 꼽아야 한다면, 나는 반드시 《걸리버의 여행》을 그 중 하나에 포함시킬 것입니다.’ H. G. 웰스에 대해 그는 ‘웰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의 마음, 그리고 따라서 물리적 세계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오웰은 아서 코에스터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코에스터와 그의 아내 마마인이 펠스티니오 계곡의 Bwlch Ocyn 별장에서 3년간 머물렀을 때 친한 친구가 되었다. 오웰은 1941년 《New Statesman》에 코에스터의 《Darkness at Noon》을 리뷰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책은 소설로서, 그리고 뛰어난 문학 작품으로서 빛나지만, 아마도 가장 가치 있는 점은 전체주의 방법에 대한 내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모스크바 ‘고백’을 해석한 점일 것입니다. 이 재판들이 두려운 이유는 그들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그런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죠—하지만 서구 지식인들이 이를 정당화하려는 열의였습니다.

오웰이 존경한 다른 작가들에는 랄프 월도 에머슨, 조지 기싱, 그레엄 그린, 헤르만 멜빌, 헨리 밀러, 토비아스 스몰렛, 마크 트웨인, 조셉 콘래드, 그리고 예브게니 자미아틴이 포함된다. 그는 루드야드 키플링에 대해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보였습니다. 키플링을 천재적인 작가이자 “좋은 나쁜 시인”으로 칭찬했지만, 그의 작품은 “가짜”이며 “도덕적으로 무감각하고 미적으로 역겨운”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부인할 수 없이 매혹적이며, 더 깨달은 작가들보다 현실의 특정 측면을 더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G. K. 체스터턴에 대해 유사한 모호한 태도를 보였으며, 그를 “로마 가톨릭 선전”에 헌신한 뛰어난 재능의 작가로 평가했다. 또한 에벌린 워에 대해 그는 “오늘날 소설가로서 있을 수 있는 최상의 수준(즉, 현재의 소설가들 중에서는)에 이르렀지만, 유지하기 어려운 의견을 가진 작가”라고 썼다.

문학 비평가

오웰은 평생 동안 책 리뷰어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의 리뷰는 널리 알려져 있으며 문학 비평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1940년 찰스 디킨스에 대한 에세이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강렬한 개성을 지닌 글을 읽을 때, 우리는 페이지 뒤에 어떤 얼굴이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는 반드시 작가의 실제 얼굴은 아니다. 나는 스위프트, 데포, 필딩, 스텐달, 타커레이, 플로베르의 경우 이 느낌을 매우 강하게 받지만, 몇몇 경우 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며 알고 싶지도 않다. 사람이 보는 것은 작가가 가져야 할 얼굴입니다. 딕킨스의 경우, 그의 사진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얼굴을 보입니다. 약 40세 정도의 남자로, 작은 수염과 붉은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웃고 있지만, 웃음 속에 분노의 흔적이 있으며, 승리의 기쁨이나 악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무엇인가와 싸우는 남자의 얼굴이지만, 공개적으로 싸우고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 너그럽게 화를 내는 남자의 얼굴—즉, 19세기 자유주의자, 자유로운 지성, 현재 우리 영혼을 놓고 싸우는 모든 냄새나는 작은 정통주의들이 동등한 증오로 미워하는 유형의 얼굴입니다.

조지 우드콕은 마지막 두 문장이 오웰을 묘사한다고 제안했다.

오웰은 조지 버나드 쇼의 연극 Arms and the Man에 대한 비평을 썼다. 그는 이 작품을 쇼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자 사회적 관련성을 가장 오래 유지할 작품으로 평가했다. 1945년 에세이 In Defence of P.G. Wodehouse에서 그는 전쟁 중 독일에서 방송한 것이 그를 배신자로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보부가 워드하우스의 행동을 선전 목적으로 과대포장했다고 비난했다.

음식 글쓰기

1946년, 영국 문화원은 영국과의 해외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캠페인の一環으로 오웰에게 영국 음식에 대한 에세이를 작성하도록 의뢰했다.] 오웰은 “British Cookery”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영국 식단을 “단순하고 다소 무거운, 어쩌면 약간 야만적인 식단”이라고 묘사하며,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에 뜨거운 음료가 허용된다”고 언급했다. 그는 영국에서 하이 티(high tea)가 다양한 짭짤한 음식과 달콤한 음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케이크 한 종류가 포함되지 않으면 좋은 티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썼으며, 이어 “케이크 외에도 티타임에는 비스킷이 많이 먹힌다”고 덧붙였다. 오웰은 토스트에 발라 먹는 인기 있는 영국식 마멀레이드(marmalade)의 자신의 레시피도 포함시켰다. 그러나 영국 문화원은 전쟁 후 영국에서 엄격한 배급제가 시행되던 시기에 음식에 대해 쓰는 것이 너무 문제적이라는 이유로 에세이를 출판하지 않았다. 2019년, 이 에세이는 영국 문화원의 아카이브에서 거부 편지와 함께 발견되었다. 영국 문화원은 오웰에게 위임받은 에세이를 거부한 것에 대해 공식 사과를 발표하며, 원본 에세이와 거부 편지를 함께 출판했다.

오웰의 작품에 대한 평가

아서 코스터는 오웰의 “타협 없는 지적 정직성이 그를 때로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벤 와텐버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오웰의 글은 그가 발견한 지적 위선을 어디서나 찌르며 폭로했다.“ 역사학자 피어스 브렌던에 따르면, ‘오웰은 일반적인 도덕성의 성인이었으며, 그의 BBC 상사 러시브룩 윌리엄스는 ’그는 과거에는 성인으로 추대되었을 수도 있거나, 화형에 처해졌을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Politics and Letters: New Left Review와의 인터뷰에서 오웰은 “경험에 직접적으로 부딪혀 그 진실을 말하는 평범한 사람의 성공적인 모방”으로 묘사되었다. 크리스토퍼 노리스는 오웰의 “소박한 경험주의적 관점—진실이 단순하고 상식적인 방식으로 말해질 뿐이라는 가정—은 이제 단순히 순진한 것이 아니라 자책적인 자기 기만으로 보인다”고 선언했다. 미국 학자 스콧 루카스는 오웰을 좌파의 적이라고 묘사했다. 존 뉴스잉거는 루카스가 오웰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모든 비판을 “사회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묘사함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오웰의 작품은 영국의 학교 문학 교육 과정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물 농장》은 중등 교육 마지막 단계(GCSE)의 정기 시험 주제이며, 《1984》는 대학 이하 수준의 후속 시험(A Levels) 주제다. 2016년 영국 여론 조사에서 《동물 농장》은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선정되었다.

역사학자 존 로든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존 포드호레츠는 오웰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신보수주의자들과 함께 서서 좌파에 반대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 시점까지 30년 이상 사망한 사람의 정치적 입장을 예측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까요?”

로든은 오웰의 “부인할 수 없는 보수적 특징”을 지적하며, “일정程度上 오웰은 우파가 그의 이름을 이용해 온 종류의 활용과 남용을 용이하게 했다”고 언급한다. 또한 “선택적 인용의 정치학”이 존재했다고 지적한다. 로든은 오웰의 에세이 “왜 나는 쓰는가”에서 오웰이 스페인 내전을 자신의 “정치적 전환점”으로 언급한 부분을 인용한다: “1936–37년의 스페인 전쟁과 다른 사건들은 균형을 기울게 했다. 그 이후로 저는 제 위치가 어디인지 알았습니다. 1936년 이후에 쓴 모든 진지한 작품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반전체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쓰여졌습니다.” 로든은 맥카시 시대에 《동물 농장》의 시그넷 판 서문이 선택적 인용을 활용했다고 설명한다:

“[서문]: 만약 이 책 itself, 동물 농장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의문도 남겼다면, 오웰은 그의 에세이 왜 나는 쓰는가에서 이를 해소했습니다: ‘1936년 이후 내가 쓴 모든 진지한 작품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전체주의에 반대하여 쓰여졌다….’


[Rodden]: 점, 점, 점, 점, 생략의 정치학.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는 윈스턴 스미스가 진실부에서 그랬듯이 증발해버렸고, 이는 맥카시 시대 초반에 일어난 일과 매우 유사하며, 오웰의 인용이 선택적으로 사용된 것이 계속되었습니다.”[3]
피블은 오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의 결정적인 경험 […]은 작가로 변모하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이는 장기간의 빈곤, 실패, 굴욕을 거쳐갔고, 이에 대해 그는 거의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다. 빈민가 생활의 땀과 고통은 경험을 문학으로 전환하는 노력에 비해 덜했다.


반면, 역사학자 아이작 데우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오웰을 훨씬 더 비판적으로 평가했으며, 그를 “단순한 무정부주의자”로 묘사했다. 데우처는 오웰이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철학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다른 사회주의 흐름에 대한 개인적 모호성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의 작품인 1984는 반공주의 냉전 선전 목적으로 활용되었다고 지적했다.

언어와 글쓰기에 미치는 영향

오웰은 1946년 에세이 “정치와 영어”에서 명확하고 정확한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호한 글쓰기가 정치적 조작의 강력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에세이에서 오웰은 작가들을 위한 여섯 가지 규칙을 제시합니다:

  1. 인쇄물에서 자주 보는 은유, 비교, 기타 수사적 표현을 절대 사용하지 마라.
  2. 짧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긴 단어를 절대 사용하지 마라.
  3. 단어를 생략할 수 있다면 항상 생략하라.
  4. 능동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수동형을 절대 사용하지 마라.
  5. 일상 영어로 대체할 수 있는 표현이 있다면 외국어 표현, 과학 용어 또는 전문 용어를 절대 사용하지 마라.
  6. 이 규칙 중 하나를 어기더라도, 명백히 야만적인 말을 하는 것보다 낫다.

오웰은 The Observer에서 7년간 기자로 근무했으며, 그 편집장 데이비드 애스터는 이 유명한 에세이의 사본을 모든 신입 직원에게 배포했다. 2003년, 신문의 문학 편집자 로버트 맥크럼은 “지금도 우리 스타일 가이드에 인용되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기자 조나단 히우드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오웰의 소홀한 언어 사용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안드루 N. 루빈은 ‘오웰은 우리가 언어 사용이 비판적 사고 능력을 제한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배적인 사고 방식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자체를 재형성하는 방식에 대해同样히 우려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웰식”이라는 형용사는 선전, 감시, 허위 정보, 진실 부정, 과거 조작을 통해 통제하는 태도와 정책을 의미한다. 《1984》에서 오웰은 언어를 통제함으로써 생각을 통제하는 전체주의 정부를 묘사했다. 특정 아이디어를 문자 그대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1984》에서 나온 여러 단어와 표현이 일반 언어에 들어갔습니다. ‘뉴스피크’는 독립적인 생각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단순화되고 모호하게 만든 언어입니다. “Doublethink”는 두 가지 모순된 신념을 동시에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Thought Police’는 모든 반대 의견을 억압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Prolefeed’는 대중을 순종적으로 통제하고 세뇌하기 위해 제작된 획일화된 표면적인 문학, 영화, 음악을 의미합니다. ‘Big Brother’는 모든 사람을 감시하는 최고 독재자를 상징합니다. 소설에서 나온 다른 신조어에는 “Two Minutes Hate”, “Room 101”, “memory hole”, “unperson”, “thoughtcrime” 등이 있으며, “groupthink”라는 신조어의 직접적인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오웰은 1945년 10월 19일 Tribune에 게재된 에세이 “You and the Atom Bomb”에서 “냉전”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붕괴가 아닌, 고대 노예 제국처럼 끔찍하게 안정된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임스 번햄의 이론은 많이 논의되었지만, 그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고려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즉, 정복할 수 없고 이웃 국가들과 영구적인 ‘냉전’ 상태에 있는 국가에서 지배될 가능성이 높은 세계관, 신념 체계, 사회 구조입니다.”

1965년 마르크스주의 문화 연구 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Keywords의 저자)는 크리스토퍼 카우들웰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오웰의 자유 개념과 그의 글을 논의했다. 카우들웰은 오웰(더 잘 알려진 작가)과 달리 스페인 내전에서 생존하지 못했다. 윌리엄스는 독자에게 “오웰에 안주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는 우리의 지적·감정적 습관과 너무 쉽게 맞물리며… 편견을 강화하거나 혼란의 인식을 지연시키거나, 새로운 성장의 시점에서 우리를 감정적으로 배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문화

오웰 협회는 2011년에 오웰의 삶과 작품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영국 등록 자선 단체인 이 협회는 옥스퍼드셔 주 헨리-온-템스 소재 필리스 코트 멤버스 클럽에서 오웰이 젊은 시절 자주 방문했던 곳에서 디온 베네블스가 설립하고 개소식을 열었다.

그의 책의 연극 각색 외에도 오웰을 주요 인물로 한 여러 작품이 작성되었습니다.

2012년 피터 코드웰과 칼 픽턴이 작곡한 뮤지컬 연극 《One Georgie Orwell》이 런던의 그린위치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오웰의 삶, 그가 살았던 세계에 대한 우려, 그리고 그가 사랑한 영국에 대한 이야기를 탐구했다.

2014년 극작가 조 서튼의 《Orwell in America》가 버몬트주 화이트 리버 주니션의 노스런 스테이지 극단에서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오웰이 생전에는 결코 하지 않은 미국 책 투어를 다룬 허구적인 이야기다. 이 작품은 2016년 오프-브로드웨이로 옮겨졌다.

2017년 영국 극작가 토니 콕스의 《Mrs Orwell》이 런던의 올드 레드 라이온 극장에서 초연된 후 사우스워크 플레이하우스에서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오웰의 두 번째 아내 소니아 브라운렐(크레시다 보나스 분)이 오웰과 결혼한 이유와 루시안 프로이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다룬다.

2019년 태즈메이니아 극단 블루 카우(Blue Cow)는 캐머론 히드럼(Cameron Hindrum)의 연극 《101》을 공연했다. 이 작품에서 오웰은 심각한 질병을 이겨내며 아버지로서의 역할, 예술, 가족, 성공 사이의 균형을 맞추며 소설 《1984》를 집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웰은 호주 작가 데니스 글로버의 2017년 소설 《The Last Man in Europe》의 주요 인물이다.

폴 서루의 2024년 소설 《Burma Sahib》에서 젊은 에릭 블레어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며, 이는 블레어가 그 나라에서 보낸 5년을 다룬 허구적 이야기다.


오웰의 출생지인 인도 비하르 주 모티하리의 방갈로가 2015년 5월에 박물관으로 개관했다.